Hotel Rixele

퇴고 언제 하니

Outer Gods 2019. 4. 3. 20:45
 시간에 탑이 하나 있었다.
   
  무한히 유지가 될 것 같은 이 땅의 생명과 그 생명을 거쳐 흘러간 시간이 기록되어 있으며, 갖은 영광과 보화가 잠들어 있다고 소문이 난 탑은 일반적인 생명체, 그 중에서도 인간의 출입을 철저히 거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재화가 탐이 난 혹은 그 탑에 기록된 이 세계의 생명을 갖게 된다면 영생을 살 수 있다는 욕심에 탑으로 향하는 인간들이 어찌 되었는지는 바람결에 숨을 죽여 사라진 것으로 더 그 이름을 퍼트렸다. 인간은 더 오랜 시간 살고 싶었다. 자신들이 이뤄낸 것을 유지하고 싶었으며,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서 신처럼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싶었다. 감히 신과 같이 되고 싶어, 신을 모독하고 자신들 스스로를 절대자라 칭했다. 신은 자신이 일궈낸 시간이 자신을 비난하고 모방하며 모욕하는 것을 참아야만 했다. 그러나, 인간은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너희의 모든 행복과 눈물을 지켜보았노라.
  나는 너희에게 공평하게 나의 사랑을 나누어 주었노라.
  그런 나를 배반한 너희를 어찌 내가 사랑하겠느냐.
  가라, 땅을 딛고 선 자의 아이야.
  나는 너희에게 단 한 명의 메시아만을 내릴 것이다.
   
  이 땅에는 두 개의 구역구역이라고 하려니 그 표현이 이상한 것 같은 두 개의 대립하는 입장이 있었다. 영생을, 불로불사를 원한다며 의학기술과 과학기술이 번영하여 왕궁을 세운 왕정도시와 영생에 오히려 반대하는 혹은 그런 복잡한 일에 엮이기 싫은 젊은이들이 모인 릭셀이었다.
  릭셀(Rixele), 신이 자신의 정원에서 실수로 만들었다 소리를 듣는, 아름다운 절경 속의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섬에 모여든 젊은이들은 이제 몇 남아있지 않았다. 텃밭을 가꾸고, 집을 짓는 것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넓은 땅이었지만 화려함보다는 소박함, 정적인 곳이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영생이 아니라 도시의 화려함,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 릭셀을 떠났다. 지금 남은 인원은 이제 겨우 열댓 명이 될까 말까인 소규모였으나 다들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집 수저가 몇 개라더라 하는 소소한 것까지는 모르지만 알 건 다 알고 있는, 말 그대로 좋은 사이의 사람들이었다. 그런 릭셀에 유일하게 높은 건물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여관이었다. 대표적인 건물로, 간혹 휴양이랍시고 왔던 도시의 사람들이 만족하며 머물다 떠나가곤 했다.
  그 해 봄은 유독 손님이 없었다. 릭셀에 세워진 작은 교회의 신부, 테오필이 기도를 하다 말고 뛰쳐나와 왕정도시를 황량하게 바라보는 것에 놀란 이들이 그를 따라 시선을 돌렸을 때, 화려하게 빛나며 그것이 꺼질 리 없다고 장담했던 왕정도시가 엄청난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다. 여관에 머물던 이들이 부랴부랴 자신들의 짐을 챙겨 어째서인지 왕정도시로 향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저것을 신이 분노한 그 증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서 테오필 같이 타인을 신경 쓰는 이들을 제외하곤 일상으로 돌아가 버렸지만.
   
  단 한 명만의 메시아를 내릴 것이다.
 
  왕정도시가 불타오르고 몇 달 뒤, 여름의 뙤약볕이 조금 죽어 곡식이 익어가기 시작할 무렵, 필요한 것이 있다며 간 김에 집 나간 이도 함께 찾아오라고 소리를 들은 이들 셋이 넷이 되어 돌아왔다. 외부인이 본다면 짐이 많아 짐꾼을 썼나 싶었지만 낯선 청년의 손에서 짐을 받으며 릭셀은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불렀다. 도시에서 온, 몇 달만의 손님들을 본 청년이 놀란 눈으로 여기 있으면 안 된다며 빨리 돌아가라고 닦달하는 것에 우왕좌왕 하던 손님들이 떠나고, 그 뒤통수를 맞은 청년, 소진은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낄낄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왕정도시가 불에 타오른 날, 도시에서 온 손님들과 함께 자취를 감췄던 소진이 도시에서 재밌는 걸 듣고 왔다며 이제 외부인이라고는 아무도 남지 않은 릭셀을 불러 모았다.
  메시아가 누구인지 예언이 내려왔다고 해요.
  소진의 입에서 나온 말소리에 테오필이 성호를 긋더니 탄식했고, 다른 이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말을 이어가는 것을 재촉했다. 몇 달 전, 왕정도시가 불에 타오른 이유는 신을 기만한 어린 양들에게 내린 벌이었다, 그 결과로 이 땅의 시간이 멈추려 한다, 그것을 막고 계속 흐르게 하려면 축복받은, 신이 인정한 단 한 명의 메시아가 저 탑에 올라 아홉 개의 축복으로 호롱에 불을 붙이고, 탑의 꼭대기에 잠들어 있다는 이 세계의 심장, 엘릭서를 깨워야 한다. 놀랍다 못해 어이가 없고 우스운 이야기였으나 릭셀은 알게 모르게 불안함을 느꼈다. 자신들에게는 떨어지지 않은 업화가 왕정도시에만 떨어졌다. 예언이랍시고 자신들 중 누군가를 메시아라며 왕정도시가 지목할 것은 눈에 훤히 보이는 것이었다.
  …미친놈들. 그렇게 중얼거리는 누군가의 말에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를 표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왕정도시의 사신, 위원회가 평화롭기만 했던 릭셀의 하늘 위로 먹구름을 끌고 왔다.
  이 마을에 있는 여관의 주방장으로 있는 이, 케밀리아 아델라인을 유일의 메시아로 하늘이 인정하였으니, 그대는 지금 즉시 탑으로 출발하여 이 땅의 시간을 일구라.
  릭셀의 사람도 아닌 이가 케밀리아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것에 모두가 소진을 노려보았으나 자신도 모르는 일인지 마시려던 잔을 떨어트리는 것을 보고 모두가 다시 위원회로 눈을 돌렸다. 정말 예언이 내려온 건가? 이마를 짚으며 휘청거리는 테오필을 부축한 나기가 교회로 들어가자 말을 멈췄던 사신이 고압적인 태도로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는 우리 하늘이 내린 단 한 명의 메시아다.
  우리들과 이 땅을 위해 지금 바로 탑으로 향하라.
  왕정도시의 접근을 막은 탑이니 그대들 이외의 사람이 신탁으로 내려올 리도 없었으니 예상한 게 아닌가.
  얼른, 출발하게. 한시도 지체 말고.
  표정의 변화가 없던 케밀리아의 눈빛이 조금 더 어둡게 가라앉을 것을 본 루카가 반발을 하려는 듯 몸을 움직이자 사신의 호위병이 칼을 뽑아 들었다. 왕정도시에서 모든 것을 지원 받은 그들을 단촐하기만 한 자신들이 이길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말없이 신탁의 서를 받아든 케밀리아를 보더니 곧 빠르게 도시로 돌아가는 위원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이들이 하나 둘, 한숨을 쉬었다.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우리도 데려가 줘, 선배.
  루카의 말을 시작으로 모여 있던 이들 중 일곱이, 이후 이야기를 들은 테오필과 나기가 뒤늦게 합류하여 총 열 명의 사람이 케밀리아와 함께 탑에 가겠다고 이야기 했다.
  혼자 보낼 수는 없으니까, 기쁘든 힘들든 함께 나누면서 가자.
  며칠 동안 짐을 꾸리고 정비한 그들은 남은 이들의 인사를 받으며 탑으로 출발했다. 릭셀의 여관은 생각보다 그 건물의 높이가 있었기에, 가장 높은 층에 올라 호수의 너머를 바라보면 탑은 안개가 끼거나 하지 않는 이상 볼 수 있었다. 이 여관을 찾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언젠가 저 탑에 올라, 신과 같은 영화를 누려보겠다고 다짐을 하는 곳이었다. 여관의 중역들과 마을을 관리하던 이들이 대거로 빠져나가며 호텔의 운영을 멈춘다는 안내 푯말을 호수 너머에 세우고 출발한 그들은 생각보다 탑에는 빠르게 도달할 수 있었다. 험난한 일이 거의 없었다. 간혹 지형이 오르고 내리는 게 있었으나 재난을 만나거나 폭우가 쏟아지지는 않았다. 바람은 기분 좋게 불었고, 해는 적당한 빛을 내려주었으며, 앞을 막는 맹수도 없었다. 정말 축복받은 메시아가 맞는 거 같기도 하네. 누구인지 모를 중얼거림에 웃고 떠들던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았었다.
   
  탑에 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도달한 후, 그들은 그 탑의 위용에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거대하고, 높았다. 탑에 들어가기 전, 그들은 잠시 숨을 고르기로 한 듯 근방에서 잠시 여독을 풀고 있을 때, 소진이 말없이 케밀리아를 제외한 이들을 몇 명씩 불러 무어라 속살거렸다. 케밀리아가 원한다면 들을 수 있었겠지만, 소진과 대화를 하지 않고 있던 이들이 금방 주위서 어수선하게 떠든 덕에 그가 무엇을 속살거렸는지 모를 수밖에 없도록, 그들이 뭔가를 감추고 싶어 했다.
  탑의 문을 열자 드러나는 것은 상당히 오랜 시간 방치된 것처럼 군데군데 틈새로 피어난 풀이었다. 이런 탑에 갖은 영광과 보화가 있다고? 미심쩍은 눈으로 탑의 천장을 올려다보니 내부는 벽을 따라 이어지는 계단이 위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인 것 같았다. 막막하기만 한 계단과 몇 층이나 있는지 알기 어려운 계단의 높이에 한숨을 푹 쉬던 이들은 힘이 없는 건지 모를 걸음으로 느긋하게 오르기 시작했다.
  몇 개의 계단일까. 관심이 없다면 세어보지 않을 정도의 계단을 오르자 나오는 것은 아까와는 다른, 파도치는 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오는 문이었다. 분명 우리들은 지상층에서 시작하여 한 층 올라온 것인데도 불구하고 들려오는 것에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던 이들은 곧 저 문을 열어야 한다는 걸 생각했다. 이렇게 말로 해봤자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케밀리아가 호롱을 들고 문을 여니 펼쳐진 것은정말 바다였다. 일반적인 바다와 다르게 물색이 싱그러운 녹색을 띄는, 파도보다는 생명이 요동치고 있는 태고의 시간인 것 같았다. 다들 그 풍경에 넋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을 만큼 아름다운 모습에 케밀리아도 눈을 깜빡이다가 곧 하나를 발견했다. 자신의 시야에 닿는 곳에서 둥둥 떠있는 작은 결정체가 빛을 내고 있었다. 저게 영광이구나. 직감적으로 그곳에 있던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럼, 가져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케밀리아가 손을 뻗는 순간에 드리운 그림자는 길었다.
   
  나를 믿었어? -.
   
  케밀리아의 뒷덜미를 잡아당겨 내동댕이친 것은 소진이었다. 자신을 믿었냐며 소리 내어 웃더니 곧 그가 결정체를 쥐자 큰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고, 너머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뭐가 일어난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 듯 눈을 깜빡이던 이들이 갑자기 언성을 높여 이야기 하는 것을 케밀리아는 들을 수 없었다.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 맞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배신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케밀리아의 등 뒤에서 싸우던 이들이 곧 너도 나도 빠르게 뛰어 탑을 오르기 시작했고, 루카만이 당황한 얼굴로 케밀리아를 일으켜 함께 올랐다.
  두 번째 문에 케밀리아와 루카가 다다랐을 때, 그 문을 막고 위협적으로 사람들과 대치하고 있었던 건 시안이었다. 얼굴을 가리던 복면과 의사소통을 위해 필담을 작성하던 펜과 수첩도 내동댕이친 시안은 제 품에서 날이 바짝 선 단도를 꺼내 위협적인 눈으로 사람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번엔 이상하게도, 케밀리아가 층에 발을 딛자 바로 문이 열렸다. 열기가 있나 싶더니 화염이 결정체를 둘러싸고 춤을 추듯,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하나를 이미 빼앗긴 상태에서 더 빼앗기면 곤란해진다. 루카의 손에서 벗어나 손을 뻗으려던 케밀리아의 속도보다, 문을 등지고 있던 시안이 더 빨랐다.
   
  이제 말해도, 안 아프니까 선물로 주십시오.
   
  시안이 뒤틀린 웃음을 지으며 빠르게 화염의 속으로 뛰어들었음에도 그 옷에는 불길이 일지 않았다. 도대체 저게 어떻게 된 영문이냐고 이야기 할 틈도 없이 제르엘이 빠르게 계단을 올랐고, 련이 그 뒤를 따랐다. 시안도 놀랐는지 그의 옷을 내려다보다가 곧 정신을 차린 듯 결정체를 쥐자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시안이 욕심이 있었나? 케밀리아가 그것을 생각하는 사이에 바로 위, 제르엘과 련이 올라간 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둘은 어째서인지 대치를 하고 있었다. 문에 등을 딱 기대고 선 제르엘과 어디서 화가 난 것인지 알 수 없는 련이 케밀리아가 오자 말을 멈췄다. 여전히 련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제르엘을 바라보며 억지로라도 문에서 떼어놓겠다는 듯 움직였지만, 제르엘이 련에 비해 체력적으로나 힘으로도 우위인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케밀리아는 조금 무서워졌다. 저 둘이 싸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서로를 너무 극진히 아껴 언성이 높아진 적은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대립을 한 적은 거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이 탑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다시 한 번 케밀리아가 층에 발을 딛자 문이 열렸다. 제르엘! 련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그 손을 쳐내고 안으로 향하는 그 등에 련은 휘청거리며 벽을 짚었다.
   
  연화야, 뭐해.
   
  은혜로운 햇빛의 아래서 화사하게 웃는 제르엘은 방금까지 언성을 높인 사람이라고는 생각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담담하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 상황에서 련을 부르며 무엇을 하느냐 재촉을 하는 것까지, 너무나도 담담해서 무서웠다. 케밀리아는 이제 그들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결정체를 쥐기 위해 손을 뻗는 엘은 마치 빛을 그러쥐는 것 같았다. 곧 쿵, 문이 닫히자마자 련이 뛰기 시작했다. 루카의 손에서 벗어난 케밀리아가 황급히 그 뒤를 따랐으나 앞서 뛴 련을 따라잡는 것은 어려웠다.
  열어, 아델. 문 위로 장갑을 낀 손을 대고 있던 련의 눈은 차분했다. 분명 그는 제르엘과 싸우고 있었다. 물론 마지막에 제르엘이 그의 이름을 언급하며 웃었지만, 겨우 그 찰나 때문에 모든 게 풀리는 사람은 아니었다. 계산하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그가 아무런 이득도 없이 혹은 자신의 판단에 옳지 않은 일을 할 리가 없었다. 케밀리아는 이 한 층을 마저 딛고 올라가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고 싶지 않았다. 오른다면, 분명 저 문이 열릴 것이다.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검은 안개가 기분이 나빴다. 저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아프다. 아프고 싶지 않다. 케밀리아를 끌어올리기 위해 련이 몸을 움직이려 하자 누군가가 케밀리아의 등을 떠밀어 올라서게 만들었다.
   
  엘, 나는.
   
  련의 행동은 깔끔하고, 틈이 없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방금 막 사라진 제르엘을 본 것 마냥, 조금 표정이 풀어지더니 곧 결정체를 쥐고 문이 닫혔다. 케밀리아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그들보다 먼저 뛰어올라가는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을 붙든 루카는 생각보다 힘이 좋은 사람이다. 그 손을 벗어날 힘이 더 없었다. 루카가 케밀리아를 단단히 잡은 것을 본 남은 이들이 다시 계단을 올랐다. 말소리 하나 나지 않고, 긴장 섞인 한숨소리만이 간간히 들려왔다.
  케밀리아가 층계에 다다르자 문이 열리며 보이는 것은 쩌적, 소리를 내며 상승하는 지대였다. 거칠게 흔들리는 땅은 얼마 안 가 결정체가 빛을 내자 그 움직임을 멈췄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웃은 테오필이 잠시 손을 모으고 남은 일행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도, 그런 테오필의 다음 행동을 막으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축도였다. 앞으로의 길에 주님 아버지의 축복을 내려주시옵소서. 평소와 다를 것 없는 걸음걸이로 문 너머의 결정을 눈앞에 둔 테오필이 가만히 다시 한 번 기도했다.
   
  부디 그들의 머리 위에 임하시어, 마지막까지 함께 하시기를.
 
  결정체가 손에 들어가자 문은 테오필의 축도가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느긋하고, 천천히, 소리 없이 닫혔다. 가만히 그것을 보고 있던 나기는 케밀리아를 붙들고 웃더니, 빨리 층계를 오르자며 웬일로 고집스럽게 말했다. 욕심이라는 게 사람을 바꾸는 것이다. 케밀리아는 그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왕정도시가 불에 탄 이유는 영생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변한 것도 그런, 욕심이나 욕망에 의해 비롯된 일인 것일까.
  쿵, 소리와 함께 낙뢰가 떨어지는 것 같더니 문틈으로 번쩍이는 빛이 새어나왔다. 나기는 무엇을 생각하는 것인지 한참 문만 바라보다가 곧 웃었다. 좋은 시구가 생각났다, 이곳에 종이와 붓이 있었다면 적었을 것이라고. 그런 나기의 등을 바라보며 케밀리아는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나기가 천천히 문으로 다가가기 시작했을 때 케밀리아는 층계에 온전히 발을 딛었다. 느리게 문이 열리는 곳은 발코니 같았다. 어둡게 먹구름이 깔린 하늘에선 낙뢰가 치고 있었고, 나기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케밀리아는 이제 그것을 말리려 손을 뻗을 힘도 없었다.
   
  쓰고 싶었던 문장이, 뭐였을까요?
   
  낙뢰의 가운데서 결정체를 쥔 나기의 목소리는 천둥소리와 같은 문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축복을 혼자 가진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지. 이제 몇 남지 않은 목소리 사이에서 들려오는 말에도 케밀리아는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알기 싫었다. 뒤에서는 이제 대놓고 다음엔 누가 갈 것이냐며 떠들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던 케밀리아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지나친 믿음 혹은 사랑그것을 끊어내지 못하면 자신은 아무런 축복도 가질 수 없을 터였다. 그렇지만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다음의 층에서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날카로운 소리였지만,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가만히 그것을 듣고 있던 라우렌이 밴드가 덕지덕지 붙은 영의 얼굴만 한참 바라보다가 문을 가리켰다. 열어줘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모습에 케밀리아는 더 이상 루카의 부축을 받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마지막에 올라가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에 루카는, 미안한 눈을 하고서도 손을 풀어주었다. 케밀리아가 꾹, 힘을 줘 딛고 올라오자 문이 열리며 정말 바람이 불어왔다.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가는 것에 기분이 좋은 듯 작게 웃은 라우렌이 태평한 얼굴로 걸음을 옮기더니 곧 휙, 돌아보더니 영의 눈을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일부러, 알죠?
   
  바람소리가 더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영의 표정은 말 그대로 굳은 채였다. 불안한 눈으로 루카가 영의 눈치를 보다가 손을 뻗었을 때는 한 박자 늦은 뒤였다. 영이 달려들어 케밀리아의 목을 조를 때도, 케밀리아는 막힌 숨만 가끔 뱉을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뭐하는 짓이냐며, 그 손을 놓으라고 윽박을 지르며 떼어놓는 루카가 아니라면 영은 그 자리에서 케밀리아의 목을 졸라 죽였을 것이다. 영은 한참 움직임이 없었다. 일부러, 되씹듯 라우렌의 말을 반복하더니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몇 개의 문이 더 남았는지는 감도 잡히지 않았다. 다만 이 문의 너머가 무엇인지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영의 눈이 평소보다 더 어두운 붉은 빛인 것에 루카가 불안함을 느낀 듯 케밀리아와 영의 가운데를 막고 섰으나, 영은 케밀리아에게 더 시선을 두지 않았다. 곧 문이 열리자 보이는 것은, 깨끗하고 하얀, 백은색의 정원이었다. 물조차 얼어붙은 듯 빛이 부서져 반짝거리는 정원에 영은 헛웃음을 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새하얀 눈 위로 검은 발자국이 찍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렵지 않게 결정을 찾은 영이 한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케밀리아가 한 걸음, 딛기 위해 움직였을 때, 영은 가볍게 결정을 쥐었다.
   
  진짜 웃긴다니까.
 
  쾅, 문이 닫혔다. 이제 남은 것은 루카와 케밀리아가 전부였다. 열 명이서 올랐는데, 남은 것은 겨우 둘이었다. 둘의 사이에는 이례적인 침묵만이 흘렀다. 더 생각하기 싫은 케밀리아와 무언가 눈치를 보는 루카만이 남았다. 분명 루카는 뭔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케밀리아는 이제 질문할 힘이 없었다. 빨리 끝내고 싶었다. 루카보다 먼저, 결정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그렇지만 루카는 생각 외로 힘이 좋은 사람이다. 분명 이번에도 불가능 할 게 분명했다.
  문이 열리자 보이는 것은 마그마였다. 조금 겁을 먹은 듯 제 옷자락만 꾹 쥐고 몸을 떨던 루카가 케밀리아를 돌아봤다. 네가 들어가지 않는다면 내가 들어갈 것임을 표명하듯 케밀리아가 바로 등 뒤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루카는 그런 케밀리아에게 한 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은 주제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걸음을 내딛었다. 뜨겁지도, 녹아내리지도 않았다. 그저 결정이 있는 곳까지 인도하듯 이어진 마그마에게선 태동처럼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루카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자신의 입안에서 머무르는 소리는 내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결정체를 잡기 전, 루카는 케밀리아를 돌아봤다. 불이 붙지 않은 호롱을 들고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케밀리아는 인형인 것 같았다. 곧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루카의 웃음소리와 함께 케밀리아는 유언인지 모를 말을 들어야 했다.
   
  미안해, 선배. 일부러는 아니야.
   
  쿵,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빛이 새어나왔다. 저것이 마지막 층인 모양이었다. 아무런 불꽃도 일어나지 않은 호롱과 비어있는 손을 몇 번 번갈아 본 케밀리아가 곧 결심한 듯 걸음을 디뎠다. 이 끝에 무엇이 기다리든 결국은 봐야만 하는 것이었다.
   
  아홉 개의 석상이었다.
  그곳에 자신은 기록자라는 듯, 온 몸을 감싸듯 자란 얇은 줄기에 둘러싸인 강현이 있었다.
  이 탑에 잠들어 있는 아홉 개의 축복은전부 메시아가 인간의 제물로써, 지고 올라와야 했던 속죄입니다.
  강현의 말에 케밀리아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기록자인 자신도 곧 죽게 됨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런 불이 붙지 않은 호롱과 손에 들린 축복이 없음에 의문을 표하는 것처럼 강현이 갸우뚱, 고개를 움직이더니 곧 몸을 일으켜 케밀리아의 손을 잡았다. 당신은 훌륭하게 해내었네요. 제물과 함께 말이에요. 케밀리아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강현 또한 말없이 그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나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추락해버렸다. 케밀리아는 이제 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탑 안에 잠든 것은 신의 벌인 모양이에요.
  소진이 일행에게 전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영화가 있다고 알려진 이유는 그래야 탑에 의심 없이 메시아가 접근하기 때문에 일부러 난 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케밀리아가 실패할 때를 대비해서 도합 아홉 명의 메시아가 더 있다고 이야기 했다. 릭셀의 출신인 이도 있었지만 왕정도시의 누군가도 있는 모양이었다. 속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벌을 내렸다. 그것도 아홉 개의. 이미 들었지만 그게 정말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던 이들은 케밀리아에게 비밀로 해야만 했다. 그가 실패하면 분명 몇 명이고 희생을 해야 할 터였다. 마음이 아프지만, 무섭고, 하고 싶지도 않지만. 희생해야 하는 것은 자신들이었다.
  거친 파도에 휩쓸려 죽고, 업화에 타오르고, 무자비한 햇빛에 말라가고, 영원한 어둠 속에서 미치더라도 그를 혼자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지에 잡아먹히고, 심판의 벼락에 사라지고, 칼날과 같은 차가운 바람에 찢겨 나가더라도 우리들은 서로 믿으면서 나아가기로 했었다. 모든 시간까지 얼어붙고, 작열하는 불길 아래서 녹아 사라지더라도 우리들이 함께 나누며 나아가기로 했기 때문에.
   
  순차적으로 동상의 손에 들린 횃대에 불이 붙었다.
  희생과 함께 모든 것을 이룬 메시아에게 내려진 더할 것 없는 축복이었다. 이것으로 이 땅의 시간은 계속 흐를 것이고, 생명은 다시 한 번 나아갈 터였다. 이용당한 것임을 잘 알았다. 메시아라고 임명을 당한 게 아니라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던 왕궁에서 일부러 사람을 뽑아 이곳에 희생양으로 삼을 셈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그들의 입장에선 운 좋게한 번에 끝낸 것이었다.
  릭셀의 교회에서, 왕정도시의 교회에서 새벽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동이 트는지 신의 축복이라는 태양빛이 그 손을 내밀며, 마지막 축복단 하나의 축복인 엘릭서의 결정이 빛을 내며 케밀리아의 시야에 들어왔다. 어차피 인간이라는 것은 반복할 게 분명했다.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면 분명 언제라도 신은 노하여 이런 시련을 줄 게 뻔했다. 케밀리아는 신을 믿지 않기로 했다. 신이라면 자신의 자리를 넘보는 아이들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 게 아니라, 웃으며 그 자리를 물려줄 터였다. 케밀리아는 들고 있던 호롱을 내동댕이치고 엘릭서를 쥐었다. 곧 그 연약한 결정은,
   
  깨져 사라졌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곧 멈출 것이다.
   
  모든 제물을 받은 이 탑은 더 이상의 출입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엘릭서는 없다. 영원히 이어지지 않을 영화나 누리다 죽어버려라. 케밀리아는 제 손에 그것들이 더 묻어있으면 안 된다는 것처럼 손을 털었다. 모든 엘릭서의 조각이 전부 털려나간 후에, 탑은 완전히 무너졌다.
   
  아홉 개의 슬픔을 만들어 내고는, 태고의 시간도 전부 멈춰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