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el Rixele

19.01.29. 로그

Outer Gods 2019. 4. 3. 20:50

  너는 무엇을 위해서 나에게 왔어?

   

  네가 나오는 꿈을 꿨어. 낮에 깨어있는 게 괴로워 밤에 잠들었는데, 그게 억지로 실패했을 때 오히려 가장 얕게 잠들었던 거야. 내 가장 근본적인 무의식 속에 잠재된 것은 여전히 너에 대한 기억인 거겠지. 그렇지 않아? 아니라면 뭐, 어쩔 수 없고. 어차피 거짓말이니까 하고 웃어넘겨 줄 거잖아. 그래, 네가 보였던 것도 같아. 어쩌면 네가 아닐 수도 있어. 내가 만난 사람은 많고, 아는 얼굴도 수두룩하잖아. 그거야 별 수 없지. 그렇지만 정말 너였다면 너는 왜 가만히 날 보고만 있었을까. 나는 네가 분에 차서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욕지기를 해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이잖아. 나는 여전히 네 앞에선 한없이 작아져야 하는 사람이고, 네 주변인들에게 허리를 굽혀야 하는데. 그래…, 사실 따지면 끝난 일이지. 안 그래?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여전히 어느 방으로, 나가는 문도 무엇도 보이지 않고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종잇장들은 또 무엇을 의미하나. 뭐든 해보면 재밌잖아. 안 그래? 그래서 뒤집어 보면, 금박이 있는 상장들이고, 이름이 까맣게 그을린 건지, 덧칠된 건지 알 수 없는 그런, 정말, 의미도 뭣도 없는 종잇조각들이라서, 어, 맞아…. 순간적으로 욕을 하며 집어 던질까 싶었거든. 근데 굳이 안 그래도 됐어. 어차피 다 의미 없는 것들이고, 그냥 별 거 아닌 종이들이고. 나한테는 필요 없는 거고,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것이어야 했던 거잖아. 그렇지? 가령 네 이름이나, 어쩌면 또 다른 이의. 그렇잖아, 아니야? 하기야… 넌 그냥 좋아서 한다고 했었지. 그런 건 별로 신경도 안 쓰는 성격이었고.

   

  어째서 너를 그리워하느냐고 물었어?

  …내가 이해를 이상하게 한 건가? 네가 그리운지 묻는 것에 어이가 없더라. 그리워? 그리울까? 내 눈앞에서 간 게 넌데, 내가 죽게 만든 거나 다름이 없는 넌데. 내가, 너를, 그리워, 해? 가능한 일인가? 가능이야 하겠지. 아닐까? 너는 그런 내가 싫었어? 머리 위로 무수히 매달린 것들과 그 가운데를 크게 휘는 소리는 진짜, 귀가 아플 만큼, 크고, 짜증이 나서. 네가 그리운가 물었지. 아니, 전혀. 너는 어때? 내가 보고 싶어서 이런 장난을 쳤니?

  무수하게 내리기 시작한 비는 비가 아니었어. 기름… 유화였던 거 같은데. 모르겠네, 무슨 상관이야. 내가 너도 아니고, 그렇게 열심히 하지도 않았는데. 가뜩이나 비가 오는 것도 질색하는 나한테 굳이 악질적으로 그렇게 쏟아낸 이유는 뭐였어? 네가 하지 못한 걸 막아서 그래? 원한도 정도껏 가져야지. 몇 년을 그들에게 잘했잖아. 몇 년을 버텨줬잖아. 그 마지막까지도 너처럼, 내 손으로 갔잖아. 뭘 더 바라. 음독은 안 된다고 해서 참았는데 뭘 더 바라. 바닥에 고여 생기기 시작한 작품은 이미 까맣게 그을렸던 내 것인지, 복잡하게 뒤엉켰던 네 것인지. 이제 그게 뭐가 중요해? 머리 위에서 떨어지기 시작한 것들이 천둥보다 큰 소리로 귓가를 때리고 사라지니 어차피 이때부터 내가 이성적이고 냉정한 생각을 할 수 있었을 리는 없었던 거지.

  그냥 불에 타면 사라질 것들인데 무슨 이유로.

   

  내가 흡연자라 다행인 건 또 처음이더라.

  제정신이라서 그 밀폐된 공간에 불을 질렀느냐 묻겠지만, 뭐 어때. 내가 죽겠다는데 너는 말릴 위인도 아니잖아. 물감과 상장을 모두 집어삼키고 그 몸집을 부풀린 게 숨통을 옭아맬 기세로 날름거려도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무섭긴 해서, 그 귓가에 들리는 소리가 더 이상 파열음이 아닌 것만 같아서 도망치고는 싶었는데. 어디로? 물감이 떨어지지 않는 곳은 없어. 네 손에 항상 들려있던 거나, 내가 한 때 잡았던 것들도 아닌 색이 불길에 휘말려 어둡게 변해도 계속 내려와.

  차라리 뛰어들면 괜찮겠지. 그게 미친 선택이라도 말이야. 그래서 뛰어들었을 뿐이야. 너는 내가 거짓말 하는 것 때문에 내 말을 믿지 못하고 사라졌어. 그렇지? 그런 내가 거짓말을 못 하게 되기를 바랐니? 그래서 그래? 아냐, 그래, 네 탓인 건 아무것도 없어. 너를 붙들지 못한 이들의 잘못이야. 내 말을 믿은 이들의 잘못이고, 내 말을 전달하며 그 몸집을 키우게 한 이들의 잘못이고, 내 말을 들은 이들의 탓이야. 맞지? 아니야? 맞아, 전부 내 잘못이야. 그래서 선물은, 달갑게 받았어.

   

  그런데,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이 세상에 동일의 가치를 둘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해?

  두 명의 목숨과 한 명의 목숨, 자신의 모든 걸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과 자신의 삶, 제 의지 하나 표명하지 못하는 사람과 자유의지로 움직이는 인형, 과거의 무언가와 현재의 감정. 너는 이게 동일하다고 생각하니? 하기야! 너는 과거가 소중하니까, 그래서 너는 나를 이렇게 만들었던 거겠지. 아니야? 틀렸니? 나랑 무슨 상관이람. 어차피 너는 내 이야기에 관심 없어야 해. 맞지?

   

  화려한 조명인가? 아니, 클래식에 어울리는 적당한 조명이네. 눈앞에 선 이는 모든 것은 유일신 아래 평등하며 사랑받는 존재라고 이야기 하던 사람으로, 그 사람의 연인과 글쎄… 아마 그보다 소중한 사람이니 옆에 있었다고 생각해. 자, 골라봐요. 너는 이 둘 중 누굴 택해요? 나는 별로 상관없잖아. 당신이 따져야 하는 경중은 나를 제외한 이 둘의 가치잖아요. 그리고 당신이 선택한 건 현재였고, 연인이었고, 단지 그뿐이잖아?

  그 다음은 어디에 매달려 있었지. 갑자기 나타난 건 또 누군가의 연인이었고. 오… 신박한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 다만 내 운이 나빠서 크게 다쳤고, 그 연인은 놀랐고, 당신은 뭔가에 휘말렸지. 이쯤 되어버리면 재앙은 내가 불러오는 건가? 나는 가는 곳마다 이러네. 아니면 네 저주일까? 알 바야. 자신의 모든 걸 내어주더라도 지키고 싶은 걸 지켰어. 당신은 그게 더 큰 가치가 있다고 본 거야. …견딜 수 있긴 할까? 나랑 무슨 상관이겠어.

  살아있느냐고 묻는 소중한 사람에게 나는 무엇을 답해야 했을까. 그 이야기를 어렴풋이 알고 있는 나는 섣불리 답을 해선 안 되고, 쉽게 그 선택을 종용할 수도 없지. 있잖아, 살아있다는 건 뭐야? 자신의 그 어떤 의지도 말할 수 없는 이와 움직이는 인형이 있다면 어느 걸 살아있다고 할 수 있어? 그 답은 뭐야? 너는 살아있어? 맞아, 악질이지. 알고 있어. 미안하게도.

  그런데 이상하지. 사람이라는 게 본래 자기 자신의 가치가 가장 높거든. 왜냐면 살고 싶으니까. 인간의 당연한 욕구이자 본능이 그거잖아. 그런데도 불구하고 따지자면 자신의 아픈 부분을 건드려져도 타인을 선택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야. 맞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이를 이해해줄 수 있어. 사람은 살고 싶은 게 당연하고, 그 어떤 것도 나보다는 하위의 가치를 두지. 물론 이건 사람마다 다른 이야기니까 어쩔 수 없겠지만 말이야. 무슨 상관이겠어. 어차피 모든 것은 개인의 선택인데. 나는 내가 생각하고 계산한 것만 잘 따져가면서 살면 되는 거잖아. 아닌가? 어떻게 생각해, 너는?

   

  뭐, 내 가치의 경중이야 관심은 없어. 뭐가 되었든 그들의 선택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

  귓가를 떠나지 않는 소리와 목을 막은 네 울음이 괴로워.

  사실 이제 그만 하고 싶기도 한데 그만 두는 방법을 모르겠어.

   

  나 한 번만 살려주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