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tel Rixele

18.11.11. 첫번째 처형 후 로그

Outer Gods 2019. 4. 3. 20:41

달은 여전해. 너는 없지만.

안상현, 달의 고백

 

 

  시야가 점멸한다. 그 너머로 사라지는 색감이 무엇이었지?

  선명하게 빛을 내던 붉은 색이 몇 번 지나갔더라. 까맣게 사라졌다 다시 빛을 낸 화면이 몇 번 반복되었고, 날카로운 총성이 몇 번 울렸더라. 그 총구의 끝에 누가 있었더라. 총을 맞지 않았던 이는 또 누구였더라. 그 화면만을 바라보며 넋 놓고 웃던 시간은 몇 분이었던가. 무언가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사라진 것이 무엇이었더라.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는 것들의 사이에 휩쓸려 사라질 것 같았던 것이 무엇이었더라. 사라진 것은 또 뭐고. 그것을 알면서도, 별 다를 것 없이 이야기 하며 웃는 나는 어디에 서있는가. 이 시간에서, 내 곁에서 사라진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나? 그게 누군지 알고 있을까? 나는 그걸 얼마 동안의 시간만 기억할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지?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무엇하나 제대로 말할 줄 모르는 내가, 기억하고 바라봐야 하는 건 무엇일까.

  나는 그들의 목소리, 웃음, 행동 하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선명하게 빛나며 사라졌던 붉은 색처럼, 그 무엇도 끌어내지 못한 채 그저 끝났음을 암시하던 검은색이 멀어지던 것처럼, 평온하다 싶을 만큼 쉽게 웃던 것처럼 나는 지금 사라진 이들의 시간에 의미를 두지 않고 흘려보내고 있을까. 무서운 사람이구나. 독하고, 잔인한 사람이구나. 여전히 누군가를 짓밟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거구나. 나는 이 와중에 내가 죽지 않았음에 안도하고 있었던 걸까? 왜 웃음만 나왔을까? 무슨 답을 내놓고 싶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나는 무엇을 위해? 무엇을 말하기 위해? 무의미한 생각이 엉킨 실타래가 되었다. 끊어낼까 싶어 선명하게 날이 선 칼날을 들이대니 깔끔한 소리와 함께, 풀린 것도, 엉킨 것도 아닌 엉망진창인 실타래가 되어 발아래로 떨어졌다. 그 아래에 비치는 것은 누구의 얼굴인가. 사라진 이들인가, 나인가, 곁에 있는 이들인가. 것도 아니라면

  나는 누굴 보고 있었지?

  누굴 봤든 그게 지금 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도 당연한 게, 겨우 이 주 남짓 되는 시간동안 정이 들어 그 깨진 틈새로 바라볼 이가 나에게 있었을 리가 없었다. 내가 그들에게 죄를 지었던가. 내가 죄를 지었던 건 따로 있는 것처럼, 죄책감이나 부담, 슬픔이 제 전신을 휩싸 안고 떨게 할 리가 없었다. 정말 독하구나. 제 주변은 그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감정기복이 심해서? 그럴 리가요. 그냥 내가 인간성이 없는 거겠지. 새삼스럽게 돌이켜 본다면 떠오를 얼굴인 게 분명한데도 가벼이 웃으며 시간을 흘려보내는 게, 어딜 봐서 좋은 사람이겠어. 그런 나를 너희는 믿었을까. 사라진 시간에 묻는다고 한들 무엇이 돌아오겠는가. 차갑게 울리는 메아리가 전부겠지.

  웃음이 사라졌던 것은 단 몇 초였을 것이다. 확신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한 두 마디를 겨우 뱉은 후엔 계속 웃었던 것 같은데. 유체이탈을 한 것도 아니면서 알고 있었다. 걱정을 사고 싶진 않으니까. 습관 같은 건가. 그럴 수도 있고. 몇 번의 경험이 알려주는 제 현재의 모습은 응당 알고 있는 모습일 것이다. 겨우 이 주. 첫 주에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랬다면, 나는 웃지도 울지도, 관심을 갖지도 않았을 거 같으니까. 이러고도 잘도 남에게 맞춰준다고 이야기 하고 다녔구나. 놀라워라. 뭐 하는 사람이지?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뭔가를 전하고 싶었던 거야?


전해달래.


  제 손에 들린 것들이 무엇인지 아는 데 한참 걸렸다.

  뭐야, 이게. 제 시야의 밖으로, 시간의 너머로 사라진 이들이 넘겨주고 간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도대체 어떤 의미로 나에게 준 거야? 믿어서? 불쌍해서? 고마워서? 좋은 사람이라서? 무겁게 생각이 얽힌다. 끊어낸 줄 알았던 실타래가 발목에 걸려 떨어지지 않았다. 왜 나에게 주는 거야? 왜 나에게 줘야 했던 거야? 당신들이 믿을 수 있는 이는 더 많았잖아. 기억하는 이는 더 있었잖아. 줘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잖아. 여기 다 범죄자야. 이런 거 남겨서 뭐해? 왜 주는 건데? 나는 뭘 생각해야 하는 거야? 괜찮아지는 거에 한참 걸릴 것 같아. 이렇게 되면, 그럴 수밖에 없잖아.

  함께 즐기는 것으로 됐다는 이가, 좋은 사람이라던 이가, 어린 애 말장난에 대꾸하던 이가, 그러지 말라며 걱정하던 이가 있었다. 한 번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일그러져 사라지던 이들이 넷. 저가 기억해야 하는 이들이 넷. 원래, 충격적인 걸 보고 몇 시간 내로 잠들면 장기기억으로 넘어간다. 장기기억은 원초아에 영향을 줄 것이다. 소위 말하는 무의식, 인간 개인 성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에 영향을 준다. 그럴 일은 없을걸. 어차피 나는, 그 모든 게 끝나고도 몇 시간을 깨어있으니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정신없이 돌아다니면서 달이 맑다는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까. 분명 그것들은 과학적으로 밝혀진 내용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 잠들지 않아도 가능할 것 같아. 나는 이미 선례를 알고 있으니까. 더 그런 걸 수도 있고. 괜히 떠오르는 후회가 있다. 할 필요도 없는 감정이 있다.

  말 한 번 들어주는 게 어려웠을까. 맞춰주는 거 한 번이 어려웠을까. 이해해주는 게 어려웠을까. 좀 더, 알아주는 게 힘들었을까. 아무것도 아니다 싶을 만큼 자연스럽게 해왔던 것들이 힘들 리가 없으면서도 제대로 해주지 않은 것들이 남았다. 그 남은 것들이 겹겹이 쌓아올린 웃음 위로 덧칠해진다. 다음엔, 다른 이에겐 더. , 손톱을 세워 목을 잡고, 짓누른다. 답답하다. 타오르는 것 같다. 괴로워서 죽을 것만 같다. 굳이 돌이켜 삼켜내면서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미련하게 행동하며 아무런 목적이 없는 감정을 들이켜 무엇할 것인가. 왜 굳이 스스로를 들쑤시지 못해 안달인가. 왜 그러고 있는 걸까. 무엇을 바라는 걸까. 난 뭘 이야기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걸까. 다만 여전히 목적이 없었다. 이유가 없었다.

  목적의식이 없는 행동은 무의미해진다.

  돌이킬 이유가 사라져가는 이들의 흔적도 그리 될 터였다.

  

  기억할 이유가 있는가.

  그 가치는 어떠한가.

  기억하는 게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쓸모없는 생각이 진득하게 들러붙어 숨을 막는다. 손에 들린 담배가 타들어가고, 그 연기가 폐부 곳곳을 쏘다녀도 숨이 막힌다. 덜 답답할까 싶었다. 옛날엔 이러면 괜찮았던 것 같아서, 오랜만에 태운 건데, 전혀 의미가 없었다. 애써 전해준 것을 하나 이렇게 쓸모없이 소비했구나. 정말 의미 없네. 그렇다면 왜 태우고 있는 것일까. 지우려고? 더 이상 보지 않으려고? 흩어져 사라지는 연기만 보고 있으니 떠오르는 게 하나가 아니었다. 엉키고 꼬여 누구의 얼굴인지도 알 수 없게 된 게 연기의 너머로 사라진다. 나는 누구의 얼굴을 떠올리고 싶었지? 왜 떠올리려고 했더라? 눈만 감으면 선명히도 떠오를 것들을 굳이 덧그리고자 했던 이유는 또 뭐지? 입새로 웃음이 샌다. 기어이 소리가 되어 터진다. 겹치는 게 너무도 많다. 누구 하나의 이름도 부를 수가 없이 뒤엉킨 얼굴이 우습기만 하다. 소리가 연기 위를 덧칠하고, 이젠 얼굴도 아닌 색채만이 남은 게 되어버렸다.

  너는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돌연 떠오르는 네 이름 한 자락이 우스웠다. 나는 어떤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이러고 있을까. 무엇을 위해 이리도 의미 없는 짓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거지? 네가 본다면 또 무어라 말했을까. 의외라고 했을까,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을까, 눈치를 봤을까, 웃었을까. 웃음이 되지 못한 소리는 울음도 되지 않았다. 그 잔재가 남아 뭉쳐 슬픔이 되지도 못했다. 되었는데 모르는 척 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겠어.

  후, 연기가 사라진다. 덮어쓰고 있던 감정도 지워진다.

  나는 또 이것을 핑계로 살아남겠다고 이야기 할까. 살아나갈 이유라고, 책임이라고, 같잖게 이야기 하며 웃을까. 정말 변하지 않는구나. 너는 나에게 무엇을 말할까. 차라리 그렇게라도 하라고 웃을까, 그러지 말라고 화를 낼까. 포기했다며 한숨을 쉴까. 어떤 반응일지 궁금한데, 볼 방법이 없었다. 그래, 일찍 잠들어야 했어. 답지 않게 말이야. 오랜 시간, 특히나 밤에 깨어있으면 드는 생각은 이런 힘든 것들뿐이잖아.


잘 가,

조심히 가

 

그런데

몇 번을 놓아도

진심으로 놓아지지를 않네.

 

/ 새벽 세시, 인사



  어차피 나는 또 이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