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모아두는 이야기
에베베 체스 룰 다 까먹었대요 본문
그런 시대다.
업화의 불길의 가운데서 달빛을 어둡게 반사하는 꽃잎이 흩날린다. 국기에 꽃잎이 스치고, 깃대를 둘러싸며 불꽃이 춤을 춘다. 채 숨이 끊어지지 못하였으나 이미 조각나버린 제 몸을 어찌 할 줄 몰라 굳어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큰 소리로 아군을 호령하고 적들을 위협하며 나아가는 이가 있다. 그런 시대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당연시 되는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를 지휘하는 무언가에 대항하지 않음은 비로소 그것이 자신들의 충절이기 때문인가. 가소로운 듯 상황을 지켜보던 이는 얼굴을 가리는 모포를 더욱 끌어내리며 걸음을 옮겼다.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만 같은 적막이, 숨소리조차 사라진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화사하게 피어난 꽃은 얼어붙은 것 같은, 백색이 가득한 정원의 가운데에 세워진 교회는 아름답고 웅장한 건물이었다. 간혹 성서의 말씀을 읊조리는 듯 낮고 듣기 좋은 목소리가 편안한 속도를 유지하며 새어나오는 시간이었다. 그 문 앞을 지키고 선 서기관이 문 너머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싶은 건지 아님 다른 무언가를 생각하는 건지 표정이 일그러져 손에 그러쥔 책자가 구겨지는 것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정세는 안정적이었으나, 유일군주여야 할 자리가 둘이라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모든 전쟁을 통솔하며 승리로 이끄나 혈혈단신으로 움직일 때 비로소 그 가치를 발하는 군주, 제르엘과 실무에 강하고 전장보다는 내정에 더 강한 군주, 강현은 비교를 하려니 상극인 인물들이었다. 알려진 이름이 제대로 없으나 그들의 주위에 가장 가까이 근접하는 것은 항상 서기관인 동시에 그의 나이트인 나기와 국교에 영향을 끼칠 만큼 그 인품과 지성을 높이 산다는 비숍 테오필이 상주했다. 아무리 실무에 강해 전장에 없는 왕이라지만 보좌가 나이트 하나인 것도, 홀로 전장에 꽃을 드리우는 왕의 보좌는 또 비숍이라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실력을 믿기 때문은 아니었다.
배신하지만 않으면 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흑색의 건물에 넝쿨을 내린 붉은 장미가 인상적인 황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황궁의 황좌에 앉은 이는, 자신에게 어울리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듯 새까만 색의 갑주를 입은 채 텅 빈 그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대부분의 가신들이 자리를 비운 것인지 알기도 어려웠다. 다만 그 와중에도 나른한 인상으로 눈만 깜빡이며 자리를 지키고 있는 흑색의 비숍만이 그가 현재 손에 쥔 유일할 말일 터였다. 그러나 사용하는 게 어려운 사람이다. 계산하는 머리가 좋고 결과를 도출함에 빠른 련은 국교회에서 인정한 게 아니라 황녀 케밀리아의 황위 즉위와 함께 비숍의 작위를 수여받은 사람이었다. 라우렌은 이 공기를 이기기가 힘들었다.
일개 병졸이었던, 폰의 이름을 받고 황궁에 입성해 그저 졸로서 그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늘 의문이었던 라우렌은 얼마 전 있었던 전장에서 아깝게 그 공적을 놓쳤다. 이미 대거 잘려나간 이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급하게 그 작위를 수여하려고 해도, 아직 남아있는 뿌리의 원성이 높아 여전히 폰일 뿐인 라우렌은 속에서 올라오는 한숨을 어떻게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한숨을 툭, 뱉어놓는다고 해도 저가 목이 잘려 나가떨어질 리는 없었다. 련은 직접 나서는 일이 적은 사람이고, 케밀리아는 깊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전쟁에서 이기고 싶은 걸까? 그 마저도 의문인 시간의 공기가 빠르게 치솟았다. 전령입니다! 시안이 돌아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영은 웬일로 제가 황궁에 다 불렸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입고 다니는 옷, 행동은 아무리 봐도 흑색의 사람이었으나 그는 언제나 백색의 부름에만 응하는 백색의 사람이었다. 미묘하게 기가 죽은 눈으로 영과 영이 이끌고 온 폰, 루카를 번갈아보던 강현은 짧은 한숨을 쉬더니 자세를 바로 했다. 말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공기가 조금씩 침잠하기 시작했다.
제르엘이 또 다시 독단으로 전장으로 나섰다는 모양이었다. 전장에서의 판단력만큼은 그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자였으니 괜한 걱정이 아니냐는 소리도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테오필로부터 다급한 전령이 뛰어 들었을 때는 경악 이외의 것을 할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제르엘이 패전했나? 아니, 분명한 승전보였다. 다만…
련과 제르엘의 만남은 모두의 예상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두 사람이 아직 색으로 구별되기 전에, 그러니까 아직 두 개의 황정이 대립하기 전까지만 해도 둘의 사이는 좋다 못해 부정적인 표현이 걸맞지 않았다. 서로를 아끼고 사랑할 줄 알며 지내던 그 둘에게 각자의 색이 다름을 알게 되었을 때 둘은 이제 스스로들의 운명을 모르고 제대로 잡지 못한 서로의 손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서로를 떠나야만 했었다. 이 전쟁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 지속되고 있었다. 매번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련이 갑자기 나선 것도 의문이지만, 제르엘이 그걸 모른 상태에서 마주쳤다면 불러올 파급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킹 혹은 비숍이 자신의 색을 배신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비숍의 경우에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비워지는 자리는 충당하면 되고, 련과 같은 인재는 찾아내면 되는 거다. 그렇지만 킹이 사라져 버린다면? 무슨 오류인지 몰라도 지금의 정세에 전장을 재패하는 군주는 실무를 올바르게 이끄는 군주보다 필요한 것이다. 지금 그 제르엘이 애타게 찾고 있던 련이 눈앞에 있을 터였다. 련이 간절히 바라던 제르엘을 마주하고 있을 터였다. 이건 양국 모두에게 비상이었다. 어찌 되었든 놓치면 안 될 인재 둘이 마주친 것이었다. 격동이 시작되려는 그 중앙에 서있었다.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던 이가 소리죽여 웃으며 기척을 지웠다. 곧 양국에서 각자의 모든 전력을 이끌고 이곳에 모여들 것이다.
그런 시대다.
루카는 구역질이 올라오려는 것을 참고 영의 앞에서 새파랗게 질린 안색을 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이들의 모습을 보기도 힘들었지만,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영을 견디기도 어려웠다. 영은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빠른 속도로 전장을 누비며 앙파상(en passant)을 이용한 빠른 전략을 보이는 라우렌을 눈으로 쫓았다. 폰이 이리도 맹렬한 속도를 자랑할 것은 예상범위 밖이었던 모양이다. 루카는 그런 라우렌을 저지해야 하는지, 제 뒤에 선 룩, 영을 지켜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앙파상을 이용하여 움직인 탓인지 그 행보는 예상이 가는 패턴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저대로 가다간 체크…, 루카가 뭔가 말하려는 사이에 영이 그 등을 떠밀어 루카를 앞으로 딛게 만들었다.
라우렌은 강현의 움직임이 없는 게 이상했다. 자신이 이렇게 움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현이 뭘 기다리는지 알 수 없었다. 아직까지 움직임이 없는 영을 불안한 듯 흘끔 쳐다보고는 다시 한 번 걸음을 쭉, 딛자 꽃잎이 흩날려 뺨을 적셨다. …신선하진 않네. 비린내 나잖아. 품평하듯 뺨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낸 라우렌은 그제야 제 위치를 알아차렸다. 대부분의 말이 움직였고, 룩은 킹에 막혀 자신을 공격할 수 없다. 이대로 움직이면 자신은 프로모션하게 될 것이다. …체크를 만들기 위해선 룩이 가장 좋다. 비숍인 련이 제르엘을 상대하고 있을 터였다. 나이트보다는, 룩을 노려야 했다.
기어이 강현과 같은 열에 서게 된 라우렌이 미묘한 얼굴로 웃으며 자신의 황제로부터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의 주군인 케밀리아는 현명한 사람이다. 말수가 적고, 느린 것에 비해 판단이 좋았다. 그건 련도 인정한 것이기에 믿어도 좋을 것이었다. 그가 자신을 무엇으로 프로모션 할지 알 수 없었다. 체크메이트로, 이 전쟁은 끝난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에.
캐슬링.
순식간에 자리가 뒤바뀌었다. 강현이 물러나고 룩인 영이 튀어나왔다. 이렇게 되면, 케밀리아의 전령이 도착하기 전이었다. 일개 폰인 라우렌이 어떻게 해볼 상대가 아니었다. 전차라고 불리우는 이유를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라우렌이 물러나기 위해 몸을 뒤틀자 프로모션이 진행 되었다. 달아나라고 말하는 것처럼, 룩이었다. 맞붙을 수 있다. 눈앞의 그만 치우면 분명 자신들의 승리다. 운명을 뒤바꿀 수 있다.
프로모션이 하나 더 나타났다. 강현이 뒤로 물러났을 때, 영의 앞을 지키던 겁먹은 폰이 사라졌을 때를 놓친 시안과 라우렌이 급하게 자신들의 주군, 케밀리아를 돌아봤다. 폰의 갑주는 어디로 가고, 백의 나이트가 케밀리아와 대치하고 있었다. 강현이 퀸의 프로모션을 쓰지 않은 게 의아했다. 굳이 나이트? 어째서? 본디 최강이라는 퀸이 양 진영 어디에도 없었다. 둘 아니 세 황제의 실책인가? 파악할 틈도 없이 맞붙은 검날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정신을 불러왔다. 한 눈 팔지 마. 그렇게 말하듯 웃는 영의 눈이 오싹한 붉은 색이었다.
테오필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둘은, 아니 여기 모두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롭게 화친을 맺고, 함께 웃고 떠들었다. 지금 테오필의 눈앞에는… 서로 죽고 못 살던 둘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형형한 눈으로 서로를 노려보는 련과 제르엘이 서있었다. 그 둘이 뿜어내는 기백에 다른 병사들은 감히 가까이 오지도 못 하고 있었다. 따진다면 체크메이트인 상황일까? 테오필은 어디서 잘못된 현실인지 생각하기를 포기하고 싶었다. 제르엘의 총구가 정확하게 련의 미간을 노리고 있었다. 련의 손에서 바짝 날이 선 것을 자랑하는 메스는 금방이라도 누군가의 정맥을 끊어낼 것만 같았다. 대치하고 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자신들은 위험한 상황이었다.
제르엘은 물러나라는 듯 테오필에게 손짓했다. 연화는, 내가 처리해. 그 결심의 속에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가시가 돋쳤음을 그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련 또한 제 등 뒤에서 자리를 지키던 이들을 물리는 듯 턱짓했다. 지금 저 둘은 서로가 가장 보고 싶었던 만큼 가장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테오필은, 그대로 물러나야만 했다. 승리를 이끄는 자신의 주군을 믿고 물러나는 것이 맞았다. 테오필이 등 뒤의 병사를 이끌고 물러나자 련의 뒤에 있던 이들도 자연스럽게 그만큼 멀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이 둘의 사이에 끼어봤자, 애먼 자신들은 죽지 않겠지만 그 후폭풍으로 찾아올 것이 둘 중 하나의 광폭한 변화라는 것을 직감한 것일지도 몰랐다.
루카는 자신이 하고 있던 백색의 휘장을 벗어버렸다.
룩도 아닌 나이트로 프로모션 한 그는, 이례적인 배신자였다. 말없이 케밀리아를 바라보는 루카의 금안이 차갑게 빛을 내고 있었다. 루카가 케밀리아를 아는 것처럼, 케밀리아도 루카를 알고 있었다. 할 줄 아는 것 없던 꼬맹이 둘이 어느 새 커서 서로에게 칼끝을 겨눈 것이다. 케밀리아는 백색의 휘장을 벗어버린다는 게 뭔지 이해했다. 그는 저가 속한 색의 조국을 배신하고 자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었다. 케밀리아가 그런 루카를 내칠 이유는 없었다.
말단 폰이든, 나이트든 전략은 하나라도 더 있는 편이 언제나 유리했다. 이례적인 프로모션은 경악을 불러옴과 동시에 신선한 바람이었다. 흑색의 킹과 백색이었던 나이트의 모습에 웃음을 짓던 시안이 제 전차에서 손을 떼더니 곧 칼을 빼어들었다. 직접적으로 전장에 나서겠다는 의미였다. 이미 라우렌이 룩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자신은 이 진영의 대부분을 방어하는 성벽이 되기도 해야 한다. 그리 판단했을 터였다.
다만 루카가 한 배신이 강현의 예상 범위 안이었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시안은 제 칼날과 부딪힌 루카의 눈을 차갑게 쏘아보며 복면의 아래로 입가를 올려 웃었다. 처음부터 제르엘이 어느 전장에 나오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을 일부러 전달하지 않은 것은 피해를 보게 하려는 의도와 함께 제 주군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련이 엮인다면 분명 귀찮아질 게 뻔했다. 그래서 시안은… 강현의 말대로 때를 기다렸던 것뿐이었다.
실무에 강하다는 것은 지략가라는 의미가 되기도 했다.
모든 게 계산된다고 하더라도 련은 제르엘이라는 말에 움직일 것이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강현에게는 승리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처음부터 목표는 케밀리아의 곁에서 지략가를 떼어놓는 것이었다. 루카의 배신은 변수로 놓았던 것이긴 해도 정말 할 줄은 몰랐었다. 다행스러운 건 시안이 자신과 뜻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지휘본부의 막사 안, 황제의 좌에 다리를 꼬고 앉아 턱을 괸 강현의 눈이 낮게 침잠했다. 테오필이 자신의 주군의 명대로, 주군을 지키지 못하고 돌아왔다. 라우렌은 위로 기어 올라간들 개죽음을 면치 못하는 폰의 운명을 바꿔 밖에서 영과 대치중이었다. 시안은 케밀리아를 노렸지만 루카를 칠 것이다. 그가 전력으로 막을 것이니까. 제르엘은 여러 의미로, 승전을 거둘 것이고 련은 체크 메이트를 선언할 터다. 모든 게 이미 결정된 것처럼 착착 움직였다. 강현의 입가로 피어오른 만족의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재미없네.
백색의 체스피스, 킹을 손에서 굴리던 남자가 한숨을 쉬며 탁, 소리가 나게 체스보드 위에 올려놓으며 책을 덮자 손을 씻고 온 것인지 수건에 물기를 닦던 청년이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너 체스 좋아했잖아. 아니야? 그렇게 묻는 청년에게 저가 덮은 책을 흔들며 보여주더니 곧 웃은 남자, 소진은 영 재미가 없었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책에 적힌 직책들이 체스피스와 비슷해 판을 꺼내 해보니 이게 무슨 아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가 싶었던 모양이었다. 결국 제르엘은 련의 체크 메이트에 의해 최종적 사망, 그러나 그의 승리야. 련에게 가장 크게 흠집을 냈으니까. 루카는 되지도 않는 다른 진영의 체스피스로 프로모션 해서 룰 파괴, 룩과 룩이 싸우면 선공인 쪽이 당연히 이기고…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거 아니야? 불평을 한없이 늘어놓던 소진이 보드 위에 올려진 체스피스를 케이스에 담아 차곡차곡 정리하는 모습을 보던 청년이 어둡고 거친 색채로 가득한 캔버스에 천을 덮는 모습에 소진이 곧 웃으며 청년의 이름을 불렀다.
우리, 여행 갈까?
같이 죽을까?
체스피스를 신과 같은 권능으로 그 운명을 움직이던 소진의 목에 감긴 붉은 실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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